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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트레킹 3 - 호남가단의 발원지 <담양>여행 이야기(국내) 2013. 11. 13. 17:50
약초 비빔밥으로 점심을 잘 먹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우리는 담양으로 넘어 갔습니다.
담양은 지금도 인구 4만이 조금 넘는 소읍에 불과하지만,
전통문화적인 측면으로는
어느 대도시에 못지 않은 많은 것들을 품고 있는 곳입니다.
대나무의 고장답게 대쪽 같은 문인들을 줄줄이 배출하고
내로라는 고관대작들이 수두룩하니 살았던 곳으로
우리는 이제 그 흔적을 찾아 나섭니다.
2시 20분경, 소쇄원에 도착했습니다.
소쇄원(瀟灑園)의 뜻은 '맑고 정갈한 원림'이란 뜻입니다.
조선 후기 전통적인 정원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지요.
그런데 정원(庭園)이란 용어는 일본식이고
원림(園林) 이란 용어가 우리의 고전적 뜨락에 적합한 말이랍니다.
입구의 도열한 대나무숲으로 들어섭니다.
소쇄원은 이름 그대로 사계절이 모두 아름답지만,
한겨울 눈덮인 대나무숲으로 올라갈 때의 그 소쇄함이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공유하기가 어렵지요.ㅎㅎ
여기도 올해는 단풍이 별로네요~~
계곡 건너편에 소쇄원의 중심이 되는 광풍각이 보입니다.
안에 들어있는 작은 방은, 겨울을 나기 위한 공간이고
바깥의 넓은 대청마루는 여름날을 위한 공간이라 하겠지요.
입구에서 약 50m쯤 올라가면 만나는 이 토석담은
소쇄원이 보여주는 절묘한 아름다움입니다.
자연적인 돌다리 위에, 인공적 흙돌담을 얹어 만들고
바깥으로 통하게 한 쪽을 터 놓은 구조는
자연적인 공간에 인공미를 더하면서도
폐쇄적이지 않고 더불어 사는 멋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소쇄원에서 제일 양지바른 언덕 위에
사랑채와 서재를 겸한 제월당입니다.
이 집의 주된 건물이라 할 수 있지요.
소쇄원을 만든 주인은 양산보라는 사람인데
기묘사화때,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되었다가
결국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낙향해
소쇄원을 만들고 평생을 은거했다고 합니다.
1,400평에 달하는 이 커다란 원림 속을 노닐며
당대의 무수한 명문장가들이 모두 찬양하는 글을 남겼다고 하니
소쇄원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짧은 글로는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당대의 명문장가들을 대충 소개하면,
기대승, 송순, 정철, 백광훈, 고경명, 김인후...등입니다.
대숲의 아름다움은 사계절 모두 나름의 안목이 있지만,
한여름에는 대숲에 들어가면 도무지 더위를 느낄 수 없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서늘함이 또아리 틀고 있답니다.ㅎㅎ
보수해서 보기에는 튼튼해 보이지만,
어딘지 자연적인 맛을 잃어버린 것 같은 돌다리도 보이고~
돌다리 아래의 개울물은 가뭄으로 말라서
원래의 그 생동감을 잃어버렸습니다.
양산보가 어릴 적에 멱 감고 놀다가
오리떼를 따라 올라와 보니,
작은 폭포와 못을 이루며 계곡이 깊어지는 곳이 있어
훗날 여기에 소쇄원의 중심을 두고 만들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퇴색한 흔적만이 가득한 고적함이 고였습니다.
연못의 물도 이끼가 낄 정도로 말랐습니다.
이 계곡으로 물이 철철 흘러내리던
초여름 유월의 어느 날 답사왔던 기억이 아련했습니다.
몇 번을 왔지만, 올수록 어딘지 퇴색해가는 느낌을
떨칠 수 없는 안타까움을 안고 돌아내려 갑니다.
소쇄원에서 1.2Km 거리에 있는 식영정으로 왔습니다.
정면에 보이는 부용당 건물은 최근에 새로 지은 것이고
원래 그 뒤쪽으로 이 집의 주인 김성원의 서하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우측에 보이는 건물이 새로 복원된 서하당입니다.
서하당 주인 김성원이 그의 스승이자 장인 어른이었던
임억령에게 지어 바친 정자가 바로 저 좌측 언덕 위의 식영정입니다.
부용당 아래 연못이 다 말라 있습니다.
부용당 뒤쪽을 돌아 우리는 식영정으로 올라갑니다.
식영정 뜰에서 내려다 본 부용당과 서하당이네요~~
유홍준 선생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육실헐 비석덩어리라고 욕을 했던 성산별곡 시비입니다.
식영정 정자 작은 앞마당의 구조에도 전혀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검은 대리석 구조물을 만들어다 올려 놓으니
전체적인 균형도 깨드릴 뿐만 아니라 미적인 안목도 전혀 없다고
돈 들여서 욕 먹는 일은 제발 하지 말라고 한 그 문제의 시비입니다.ㅎㅎ
벼락을 맞아 거의 위쪽이 고사해버린
5백 년 묵은 소나무입니다.
저 커다란 시비가 소나무 앞에 세워진 까닭에
소나무의 위용이 반감되고, 어쩌다 벼락까지 맞아서
지금은 서로 더욱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구조물과 나무~!
안목 없는 사람들이 만든 또 하나의 상처를 보는 느낌입니다.
식영정(息影亭)이란 현판이 보이는 곳에서 그 뜻을 생각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그림자가 쉬어가는 정자'란 뜻이지만,
그 이면에 더욱 깊은 뜻이 들었습니다.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란 뜻이랍니다.
(문을 저렇게 들어올려 놓은 것을 '들장지'라고 합니다)
장자에서 말하기를
옛날에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그림자를 벗어나려고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났다.
그런데 그림자는 사람이 빨리 뛰면 빨리 따라오고
천천히 뛰면 천천히 쫓아오며 끝내 붙어 다녔다.
다급한 김에 나무 그늘 아래로 달아났더니
그림자가 문득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임억령이 김성원에게 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자
김성원이 말하기를
'사람과 그림자의 관계는 그렇다고 치고
선생(임억령)께서 스스로 자기 빛을 숨기고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은
자연의 순리와 관계없는 일이 아니지 않느냐'고 되물으니
'내가 이 외진 두메로 들어온 것은
한갓 그림자를 없애려고만 한 것이 아니라
시원하게 바람 타고, 자연조화와 함께 어울리며
끝없는 거친 들에서노니는 것이니~~
그림자도 쉬고 있다는 뜻으로 식영(息影)이라 이름짓는 것이 어떠냐?'
라고 물어 김성원과 더불어 지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가끔 아궁이에 장작을 때어
훈기를 넣고 있는 모양입니다.
식영정에서 내려다 본, 광주천을 에전에는 '자미탄'이라 불렀습니다.
'자미'는 '배롱나무'를 뜻하고 '탄'은 '개울'이란 뜻입니다.
예전에는 저 개울물 양쪽으로 배롱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쨌거나, 식영정의 주인이었던 임억령 선생의 고매한 인품으로
주변에는 호남의 유명한 사림들의 들끓으며
끝없이 시문을 짓고 흥성거리며
호남가단의 발원지가 되었던 것은 틀림이 없지 싶습니다.
이제 정철의 스승이었던 김윤제의 정자, 환벽정을 찾아 갑니다.
정철은 어린 날에 누나가 둘이나 왕족의 여인이 됩니다.
인종의 후궁이 된 누이와, 계림군의 아내가 된 누이 덕분에
왕궁에 출입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동갑내기 경원대군(훗날의 명종)과 친구가 됩니다.
그러나 몇 년 후,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연루되어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하면서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를 떠돌다가
15세 되던 해에 유배가 풀려, 지금의 창평 땅에 정착하게 되지요.
이때부터 약 10년간 김윤제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26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양으로 입성하기까지
담양과 창평의 유명한 문장가이자 학자가 되지요.
또한 스승 김윤제의 조카딸과 혼인하여
스승과는 더욱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김윤제의 정자였던 <환벽당>으로 올라갑니다.
지금은 다 져 버렸지만, 올라가는 계단 양쪽으로
9월 중순이면 매혹적인 꽃무릇이 무리지어 피어
방문객들에게 환영의 손을 흔들어 줍니다.
환벽당(環碧堂)이란 당호에 어울리게
이 정자의 툇마루에 올라 앉아 사방을 둘러 보면
온통 나무와 기화요초에 둘러 싸여 있는 곳이 바로 이 정자입니다.
푸르름으로 둘러놓은 집이란 뜻의 환벽당~!
지금은 그 푸르름이 모두 가을빛으로 바뀌었지만,
초록이 출렁이는 계절에 오면 그야말로 이 집은
초록의 수목 속에 들어앉은 요정의 집과 같은 곳입니다.
잠시 환벽당 툇마루에 앉아 지난 날들을 떠올립니다.
15년 세월, 전국으로 국문학 답사를 다녔던 시절,
담양과 창평, 그리고 해남을 오가며
시조문학의 대가였던 윤선도 선생과
가사문학의 대가였던 정철 선생의 흔적을 찾아
제일 많이 다녀갔던 곳이기도 합니다.
450년 전쯤엔 이 툇마루에서
스승인 김윤제 선생과 정철이 함께 시문을 짓고
담론을 펼치며, 호방한 웃음을 나누었을지도 모릅니다.
연을 키웠던 연못에서는 연실이 매달린 채 시들어
어딘지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환벽당을 내려와, 가까이 있는 송강정을 지나
면앙정을 찾아 갑니다.
면앙정 송순은 말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담양으로 돌아와 정자를 하나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면앙정(俛仰亭)이라 지었습니다.
이 면앙정에서 가사문학 <면앙정가>를 지으면서
유명한 면앙정 가단을 일구어내지요.
<면앙정가>는 정극인의 <상춘곡>을 이어
정철의 <성산별곡>으로 이어주어
본격적인 가사문학 시대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정자에서 내려다 보는 풍광들은 하나같이
정자가 정말 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면앙정'을 넣어서 한자 3행시를 지은 편액입니다.
대충 해석을 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굽어보니 땅이 있고
우러러보니 하늘이 있는데
그 사이에 정자를 세우고
호연의 흥취를 느끼는구나.
바람과 달을 불러
산과 시내와 함께 누리며
지팡이하나에 의지하여
한 평생을 보내고 싶구나~!
해가 짧은 늦가을이라 한없이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다시 아쉬움 접고 떠납니다.
가까이 있는, 송강정, 취가정, 명옥헌, 가사문학관 등은
국문학 답사가 아니기에 그냥 지나갔습니다.
담양은 언제나 가도, 가 볼 곳이 정말로 많습니다.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 끝자리로 돌아들어
관방제림의 거대한 묵은 나무들을 만났습니다.
건너편 개울가에는 오리떼들이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습니다.
약 160년 전, 철종 때에, 관에서 관비들을 동원하여
해마다 이 물이 넘쳐 홍수가 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제방을 쌓았고, 제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나무를 심었는데
관에서 쌓은 제방이란 뜻으로 관방제(官防堤)라 부르고
그 제방 위의 나무들을 관방제림(官防堤林)이라고 합니다.
더러는 단풍이 들기도 했지만,
여기도 역시, 아직은 푸른 잎들이 가득합니다.
오래 사는 나무들의 종류들이 여기에 다 모여 있는 듯한 곳,
팽나무, 푸조나무, 느티나무, 서어나무...
200~300년 묵은 나무들 사이를
이리저리 거닐다 보면, 뭔가 나무들의 비밀스런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여인네의 몸매를 연상시키는 나무에서부터~~
온갖 모양새의 나무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풀어놓을 것 같은 길로
한없이 걷다 보니, 날이 저물어 옵니다.
멀리로 아득하게 해가 산 능선에 걸렸습니다.
담양에 왔으니, 이제 담양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덕인관의 떡갈비를 먹으러 왔답니다.
네비 찍어서 왔더니, 여기는 구관이고
우리가 예약한 곳은 신관으로 가야한다고 하네요~~
여기서 약 2Km를 다른 곳으로 가야합니다.
덕인관 신관은 엄청 크게 새로 신축한 건물입니다.
평일인데도 제법 사람들이 북적입니다.
기본적인 찬이 깔리고~~
떡갈비 가격도 제법 비쌉니다.
떡갈비입니다.
1인분이 세 덩이씩 27,000원이니
비싼 가격에 비해, 별다르게 특별한 맛은 없었답니다.ㅎㅎ
후식으로 나온 밀감과 냉매실차~!
저녁을 먹고, 몸과 마음을 다시 추스려
깜깜한 밤길을 달려 부산으로 돌아왔습니다.
특별하게 아름다운 단풍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정겨운 이들과 함께 떠난 여행이
또 하나의 추억으로 곱게 남았습니다.
다섯 명이 일정을 짜다 보니,
이번 여행은 2박 3일이 불가능해
1박 2일로 짧게 다녀왔지만,
아쉬운 만큼의 여운을 다시 내년 봄을 위해 남겨둡니다.
함께 걸었던 동행들 모두 수고했고,
긴 여행기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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