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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성지순례기 8 -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곳 '쿠시나가라'여행 이야기(해외) 2025. 2. 12. 23:21
1월 18일~!
오늘도 4시 30분에 출발하여
부처님이 열반하신 곳 '쿠시나가르'를 향해 떠난다.
오늘은 우리 조가 캐리어를 버스에 싣는 당번이라
4시부터 나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1시간 30분을 달려가서
께사리아 대탑을 먼저 참배하고 간다.
세계에서 젤 거대한 불탑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언제, 누가, 왜 만들었는지는 모르는 탑이다.
탑을 배경으로 해를 뜨려고
하늘이 벌겋게 물드는 광경도 장관이었다.
우리 일행들 말고는 아무도 없는 시간~!
우리가 새벽부터 힘든 강행군을 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아무도 없는 유적지를 우리들만 참배하는
오롯한 경건함을 맛보기 위함도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가사를 수하고 걸어서
바로 탑돌이부터 들어갔는데
탑이 얼마나 거대한지, 400명이 줄지어 돌아도
서로 만나지 못할 만큼 거대했다.
불교학자들이 추측하는 탑의 기원은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부처님이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출가를 선언한 곳이다.
둘째는 부처님이 열반을 선언하고, 쿠시나가라를 향해 떠날 때
바이샬리의 리차비족들이 칸타키강까지 따라와
한사코 돌아가지 않으니,
부처님은 정표로 바루를 강에 띄워 보내는데
그 바루를 가지고와서 그 위에 탑을 쌓은 곳이다.
이 중에 1번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고 하지만
아직도 정설로 인정되지는 않고있다.
기단부터도 엄청난 크기와 견고함을 느끼게 하는 탑이다
탑돌이를 마치고, 선 채로 예불을 올리고 반야심경 독송하고
각자 사진 찍는 시간을 가지고, 버스로 돌아갔다.
안개 자욱한 아침은, 늘 눅눅하고 추웠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 만난 '칸타키'강이다.
제법 커다란 강을 건너, 바루가 무사히 온 것도 놀라운 일이고,
부처님의 마지막 길에 그렇게 '예'를 다한 것도 감동스런 일이다.
부처님이 바이샬리를 거쳐, 쿠시나가르 한적한 시골에서
열반에 드신 일을 두고, 학자들간의 추측은
부처님은 바이샬리에서 자신의 고향 카필라성으로
돌아가는 중에, 예정보다 일찍 열반에 드시게 되어
쿠시나가르를 선택하게 되었다고 정리를 한다.
그러니 부처님께서도 수구초심의 마음이 있으셨던 것이다.
다음으로 '춘다의 공양터'를 찾아가는 길이다.
버스에서 내려, 작은 시골 마을을 가로질러
좁을 골목길을 길게 통과하면
마을 한구석에 춘다의 공양터가 유적지로 남아있다.
부처님께 바친 2대 공양은
수자타의 공양과 춘다의 공양이라 할 수 있다.
수자타의 공양으로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어 부처를 이루었고
춘다의 공양으로 급성장염을 얻어, 예정보다 일찍 열반에 드시었다.
마을 한 쪽 끝에 춘다의 공양터는 문이 잠겨 있었으나
곧 관리인이 와서 문을 열어주었다.
부처님이 칸타키 강을 건너, 파바마을에 이르렀을 때
커다란 망고 과수원에서 잠시 쉬어갔다.
그 과수원의 주인이 바로 춘다였고,
마을 대장장이의 아들이었다.
춘다가 부처님께 다가와, 다음 날 아침 공양을
자신이 올리고 싶다고 허락을 구했고
부처님은 묵언으로 허락을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큰 흉년이 들어 다들 먹고 살기가 어려운 시기라
아난다는 가난한 춘다가 공양을 올릴 수 있을 지 걱정을 했다.
다음 날, 아침 춘다가 부처님께 와서 말했다
"부처님 공양이 준비되었습니다. 때를 아소서"
그러나 춘다가 올린 공양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올린 것이
야생 토란으로 만든 즙, 혹은 주스 같은 것이었는데
독성이 강해, 이것으로 부처님은 급성장염에 걸렸고
공양을 마치고, 다시 길을 떠나기 무섭게
배가 심하게 아프면서 피가 섞인 설사를 했다
부처님은 까꿋타 강에서 목욕을 하고
근처의 망고나무 아래 가사를 벗어
네 겹으로 접어 깔고 누웠다.
그리고 아난다에게 심한 자책감에 빠진 춘다를 불러오라고 했다
"춘다여, 걱정하지 말아라, 네가 올린 공양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공덕을 가진 공양이 될 것이다."
이 말씀에 춘다는 근심을 내려놓았고
대중들 사이에서도 춘다에 대한 원망이 사라졌다
이후 사람들은 춘다의 공덕을 기리며,
그 자리에 탑을 세웠는데, 스님이 앉아 계신 뒷쪽이 바로 탑터이다.
수자타의 공양은 수자타를 위대하게 만들었지만,
춘다의 공양은 오히려 부처님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부처님은 죽음으로 가는 과정 속에서도 오히려
대자비심으로 중생의 근심과 고통을 없애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춘다의 공양터를 나오면
길가에 무더기로 서 있는 이 표식이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묘지석 같았다.
그러니까 이 부근이 일종의 부락민 공동묘지가 아닐까 싶었다.
부처님이 심한 설사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고, 열반을 준비하셨다는
'까꿋타'강인데, 작은 개울 같았다.
인도에는 세탁을 업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기서 열심히 세탁하는 분들이 그런 분들로 보였다.
강은 바닥에 이끼가 심하고 더러워 보였지만,
물을 손바닥으로 떠보면 그런대로 깨끗했다.
더러 세수도 하고, 손도 씻으며
잠시 부처님의 마음을 떠올려 보았다.
11시를 훌쩍 넘긴 시간에
숙소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하고,
다시 바랑을 챙겨 열반당을 향해 걸어갔다.
길가 노점상에 자세히 보면
계란을 쌓아놓고 판매하는 것이 보인다.
계란 한 판 가격이 250루피(4,200원 정도)라
부담없이 사다가 삶아 먹는 것이 좋은 발견이었다.
사탕수수로 즙을 내어 판매하는 곳인데
이걸 한번 사먹고 싶었지만
번번이 시간이 쫒겨서 결국 먹어보지 못했다~~ㅎㅎ
열반당 출입구를 통과하는 동시에
신발을 벗게되어 있어, 모두 덧신을 준비하고
입구에 들어서면서, 가사를 수했다.
열반당이 있는 커다란 정원 내부는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어,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
17년 전에 왔을 때만 해도
칠이 다 벗겨진 열반당의 모습이 을씨년스러웠었다.
왼쪽이 부처님 열반상이 모셔져 있는 열반당이고
오른쪽은 부처님의 사리탑이다
사리탑 뒷쪽의 낮은 곳에
벽돌로 쌓은 조그만 탑의 기단만 남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아난다의 탑'이라고 한다.
상층부는 허물어지고 완만한 경사를 지닌 벽돌의 노두가
마치 파도에 씻긴 바위처럼 생긴 아주 작은 탑이었다.
부처님을 25년간 입안의 혀처럼 시봉한 아난다는
죽어서도 부처님의 열반상 옆에서
부처님을 시자 역할을 착실하게 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나는 잠시 마음이 울컥했다
우선 우리 일행은 모두 네 겹으로 둘러싸면서
400명 전원이 열반당 안으로 들어섰다.
선 채로 예불을 올리고, 반야심경 독송하고, 한 줄씩 빠져나왔다.
열반당에 누워 있는 거대한 부처님 열반상은
5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근처의 강바닥에서 발굴,
보수하여 열반당에 모신 것이다.
길이 6m 정도이며, 얼굴과 발을 제외하고
황색 가사를 덮어놓고 있었는데
예전에 왔을 때는, 때가 낀 듯한 황색 천이었다면
지금은 화려하게 수놓인 천으로 바뀌어 있었다.
17년 전에 열반당을 방문했을 때는
유리보호막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부처님 발바닥을 만져볼 수 있었는데
그때 나는 부처님 발바닥을 만지면서 눈물이 솟구쳤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신 부처님도
생로병사는 피해갈 수 없는 것이었구나... 싶은 생각과
맨발로 45년을 걸어다니며 전법을 펼쳤던 그 수많은 시간 속에서
이 발바닥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하는 생각에
솟구치는 눈물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앞에 보이는 유리보호막 안에 가방을 메고 서 있는 분은 힌두교도로
열반당의 관리를 맡고 있는 인도 정부의 관리인이다.
부처님의 머리 위에나 발바닥 아래 던져진 돈은
이 사람이 모두 거두어 가지고가고,
보시함 안에 넣는 돈은 미얀마 스님들이 가져가서 열반당 관리에 사용한다.
그러니 불자들이 열반당에서 보시를 하려면,
반드시 보시함에 하는 것이 제대로 하는 것이란 것을 알려둔다.
열반당의 부처님 곁에 조금 더 있고 싶었지만,
정해진 시간이 끝날 무렵이라 아쉬움을 접고 나왔다.
바깥으로 나와, 열반당이 잘 보이는 곳에
모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스님의 설법을 듣고, 설명도 들었다.
부처님이 이 곳에 와서,
쌍사라수 아래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 깔고 누워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마을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여래가 오늘 밤에 열반에 든다.
그러니 여래를 친견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다 오도록 하라.'
'부처님을 존경하는 왕도 있고, 재가 신자도 많고, 부자도 많고
수행자도 많은 라즈기르나 바라나시, 코삼비 이런 곳에서 열반에 드시지
왜 이런 궁벽한 시골에 와서 열반에 드십니까?'
'아난다여, 그런 말을 하지 마라.
먼 옛날에는 이 곳이 성스러운 곳이었다.
먼 미래에도 이 곳은 성스러운 곳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말라족의 왕궁에 가서 열반에 드시지
왜 이런 숲속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아난다여, 그런 말을 하지 마라
숲속에서 열반에 들어야, 사람이든 짐승이든 하늘의 신이든
본인이 원하면 누구나 다 여래를 친견할 수가 있다.'
25년을 시봉했던 스승님이 열반에 드신다니
아난다는 너무도 슬퍼서 숲 속 나무에 기대어 혼자 울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우리는 큰 공덕을 쌓을 기회가 없지 않습니까?'
'아난다여, 그런 걱정은 하지 마라
여래에게 올리는 공양과 똑같은 공덕이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고,
둘째 아픈 사람에게 치료약을 주는 것이고,
셋째 가난한 사람을 돕고, 외로운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고
넷째 청정하게 수행하는 자를 잘 외호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 JTS의 이념이라고 스님을 말씀하신다.
부처님은 대중을 모아놓고 마지막 유훈을 남긴다
'세상은 덧없다. 부지런히 수행정진해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마지막으로 스님의 발원문 낭독이 있었고
우리는 모두 스님의 발원문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우리 조의 차례가 와서
스님과 열반당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
버스로 10분 이동하여,
오늘의 마지막 여정 '라마바르 총'으로 왔다.
부처님의 다비식을 거행했던 곳에 세운 탑인데,
상부가 허물어지고, 지금은 무덤 같은 언덕만 남았다.
먼저 스님 따라서 탑돌이를 한 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자, 거기서 약 1.6km 떨어진
쿠시나가라 교외, 말라족의 사당이 있는 이곳으로 옮겨왔다.
여기는 말라족의 역대 왕들의 대관식이 행해지던 성지인데
부처님을 존경했던 말라족은 여기서 다비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다비식을 마치고, 유골은 8개 나라에서 나눠가고
그 자리를 기념해 탑을 세웠는데, 여기가 탑터로 남은 언덕이다.
야자수가 줄지어 서 있는 풍경이 이국적이었다.
자리를 정돈하고, 모두 함께 예불을 올리고 명상을 했다.
명상이 끝나고, 스님의 법문을 듣고,
부처님의 생애 마지막 여정을 따라온
긴 여운이 남는 곳에서 우리는 작은 천도재를 준비했다.
지난 밤에 각자 천도재에 올릴 명부는 미리 작성해 제출한 상태였기에
부처님을 화장한 장소에서, 우리 또한 인연있는 영가들에게
천도의 공덕을 나누기로 시간과 마음을 내었다.
나도 친정엄마랑 외할머니, 그리고 시아버지 명단을 올렸기에
순서대로 나가, 잔을 올리고 절을 올렸다.
머나먼 인도의 부처님 다비식장에서
영가들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노라니,
다시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감사한 마음이었다.
길고도 길었던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다시 숙소로 걸어오는 길,
목이 말라, 모두 함께 코코넛 하나씩을 마시고
해 넘어가는 광경을 만나며 숙소로 돌아와
밥을 지어 먹고, 다시 내일 도시락을 싸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국경을 넘어 네팔로 넘어가는 날이라
새벽 1시 30분 출발이다.
여기는 마당에 불을 피워, 더운 물을 끓이고 있어
그 물을 가져다 씻어라기에,
뜨거운 물을 받아올 그릇도 마땅치가 않아
찬물로 대충 씻고 다들 고단한 하루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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