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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성지순례기 7 - 부처님이 가장 사랑했던 땅 '바이샬리'여행 이야기(해외) 2025. 2. 9. 17:33
1월 17일~!
부처님이 가장 사랑했던 곳이고
인도 최초의 공화국이었으며
부처님 안에서 자유와 평등이 실현된 곳이며
부처님이 마지막 안거를 마치고 열반을 선언하셨던 땅
바이샬리로 가는 날이다
오늘도 새벽 4시 30분에 출발
바이샬리 숙소까지 4시간 정도를 예상하고 달려갔는데,
인도의 도로사정이 날로 좋아져 3시간 만에 도착했다.
숙소가 비워져 있는 상태라
아침부터 숙소에 짐을 풀고,
모처럼 편안하게 아침식사를 했다.
그리고 시간적 여유가 조금 있어서
인도에 도착하고는 처음으로
준비해간 믹스커피 한 잔씩을 나눠 마셨다.
커피믹스 20개 가지고 갔는데
이때 마신 것이 첨이자 마지막이었다.
믹스커피 한 잔의 귀함을 가슴 깊이 새겼던 순간~!
버스에 남겨 두었던 짐들을 모두 챙겨 내리고,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바이샬리 진신사리탑터로 갔다.
바이샬리는 부처님 당시 인도 16대국 중 하나로
가장 대표적인 공화제 국가였다.
당시 인도는 300여 개의 크고 작은 나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중 16개 나라가 대국으로 불렸으며,
마가다국과 코살라국 같은 초강대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이샬리는 부처님과 여러 가지 인연이 있었던 땅이다.
부처님이 왕사성 죽림정사에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여 명성을 얻고 있을 때,
바이샬리에는 심한 가뭄이 들었다.
가뭄이 심할 때는 성인을 모셔와 공양을 올리면
비를 부를 수 있다고 믿어, 부처님을 초청했다.
부처님이 강가강을 건너 바이샬리에 발을 딛는 순간 비가 내렸고
이 사건 이후로 바이샬리 사람들은 자연스레 부처님께 귀의하게 되었다.
바이샬리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공양을 올린 일이 있는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원후봉밀터에서 자세하게 이야기하기로 한다.
바이샬리는 당시 인도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도시였는데
여성 출가가 가능했던 것도 이러한 배경 덕분이었다.
당시 인도에서 여성은, 어릴 적에는 아버지의 소유물이고
결혼을 하면 남편의 소유물, 남편이 죽고나면 아들의 소유물로 인정되어
독립적인 인격으로 인정받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부처님은 카필라성에서 여성출가를 요청받았고,
이를 허락하지 않자 맨발로 바이샬리까지 따라왔기에
바이샬리에서 이를 허용하는 결단을 내렸다.
부처님이 마지막 안거를 보내고
3개월 뒤, 열반을 선언하신 곳도 바이샬리이며
부처님 열반 100년 후, 제 2차 결집이 이루어진 곳이고,
2차 결집에서 보시를 돈으로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으로
교단이 분열된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바이샬리는 부처님과 관계되는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유물과 유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순례객들은 그냥 지나치는 곳으로
우리들처럼 1박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스님 설명을 듣고난 뒤,
예불을 올리고, 경전독송을 하고,
탑돌이 준비를 했다.
이 곳의 진신사리탑은 부처님 열반 후, 화장해서
부처님과 인연이 있었던 8부족이,
유골을 8등분해서 나누어가게 되었는데
그 중, 릿차비족이 가져온 부처님 유골을 봉안했던 진신사리탑이다.
8개의 사리탑 중에서 지금 남아서 전하는 곳은 3개 뿐이고,
그 중 하나가 이 곳 바이샬리의 진신사리탑이다.
현재는 델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지만,
지금 비하르주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오기 위해 대규모 탑을 신축중인데
앞에 보이는 희미한 돔형의 건물이 그것이다.
그러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부처님의 타고 남은 유골이었으며, 보석처럼 생긴
작고 빛나는 구슬 같은 알갱이는 아니다.
그러니 보석 같은 구슬을 모셔두고
부처님 진신사리라고 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그러나 간혹 고승들 중에는
타고 남은 뼈 사이에서,
보석 같은 구슬이 나오는 경우가 있으므로
그런 것까지 거짓말이란 뜻은 아니다.
탑돌이 준비를 하고,
천천히 걸어서, 400명이 모두 진신사리탑터를 네 겹으로 에워쌀 때까지
'석가모니불'을 부르며 걸었다.
아쇼카왕 시절에 이 탑을 해체해서
진신사리를 꺼내어 중요한 불교 유적지에 모두 나누어 탑을 세웠고
여기에도 남겨 두었지만, 지금은 델리 박물관으로 옮겨가고
탑터만 남겨졌으나, 이 곳은 불교 유적지로는 아주 귀중한 곳이다.
진신사리탑터에서 4km 북쪽으로 가면
'원후봉밀터'가 있어 그리로 이동한다.
불교 유적지가 있는 곳은 한결같이
불가촉천민들의 마을과 함께 있다.
아이들이 길가에서 바닥에 포대를 깔고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책상도 책도 필기구도 없이, 선생님의 말을 따라 하고 있었다.
수자타 아카데미도 시작은 저러했으리라
원후봉밀터는 부처님 당시 '대림정사'가 있었던 곳이다.
부처님이 이 곳에 탁발을 나와
바루를 나란히 돌 위에 올려 두었는데
어디선가 한 무리의 원숭이들이 나타나
부처님의 바루만 들고 가더니
야생꿀을 가득 담아 제자리에 올려 놓았다는 이야기가 유명한 곳이다.
아난다 스투파가 있고,
그 곁에 나란히 아쇼카왕의 석주가 서 있는데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보기 드문 석주이다.
다른 불교 성지와는 다르게
정말 한가롭고도 조용했다.
스님 법문을 듣고,
예불 올리고, 경전독송하고,
모두 바루를 챙겨 들고
꿀 받아먹는 체험을 했다.
한 줄로 서서 나란히 가면,
빵 한 조각 위에, 준비된 꿀을 한 국자씩 올려주었는데
꿀 넣은 바루를 받쳐들고,
줄지어 탑돌이를 시작했다.
탑 뒷쪽으로, 태국에서 온 듯한 순례자들이
경전을 독송하고 있었는데
그 외의 순례자들이나 관광객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었다.
한때, 북인도 일대의 교통, 문화, 경제의 중심지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당시엔 가장 화려하고 부유했던 도시
바이샬리가 이렇게 버려진 땅이 되어버린 것이
아주 아쉽고 씁쓸한 마음이었다.
나오는 문앞에는 아이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고, 스님은
준비한 사탕을 똑같이 나누어주셨다.
돌아오는 길가에 바나나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는데
인도에서 사먹은 과일 중에 제일 가격이 싸고 맛있었다.
숙소 앞에서 짜이 한 잔씩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모처럼 여유가 있었던 날,
우리는 양배추도 사고, 감자랑 완두콩이랑
계란도 한 판 사 왔다.
저녁밥은 밥위에 양배추를 올려 쪄서
볶음고추장으로 쌈밥을 너무 맛있게 먹고
담날 아침밥에 감자랑 완두콩을 넣어 도시락을 싸두고
밥통에 계란 한 판을 삶아, 나누어주었다.
내일 일정이 아침공양을 거의 11시가 넘어서야 하기에
삶은 계란으로 허기를 면하라고 주었는데
참 요긴하게 잘 먹었다고 인사를 받았다.
저녁 먹고, 다들 숙소 마당에 모였다.
오늘은 모처럼 여유가 있는 날이라
밤중 바이샬리 왕궁터에 모여
차별, 조별 장기자랑을 하기로 했다.
우리 10호차는 단체 댄스로~~ㅎㅎ
밭둑길을 따라 10분쯤 걸어갔을까?
아주 커다란 공터가 나왔고,
일행들은 모두 빙 둘러 앉았다
가운데 아주 넓은 무대에
별빛을 조명으로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끼와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사랑으로'를 합창하고, 모두 숙소로 돌아왔다.
바쁘게 다닌 일정 중에서, 제일 여유가 있었던 날이었다.
내일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던 땅
쿠시나가라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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